저의 이름은 홍성실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성실함이 확 느껴지시죠. 저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에게 “이름처럼 성실하다”라는 말을 하십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 표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저는 불성실이라 불리며 ‘난 성실해야 하는거구나.’라는 자기 굴레에 갇혀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저의 지금 이름은 가식이입니다 모든 것이 가식적인 삶이 되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은 좋은 성도처럼, 직장에서는 자기일 잘하는 성실한 사람처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마음 좋은 너그러운 사람처럼.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희 가족은 저의 본 모습을 알고 있지요. 안과 밖이 180도 다른 저의 본 모습을요. 또 한분 저를 잘 아는 분이 계십니다. 주님이시지요.
몇 주 전 저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부모님과 트러블이 있었습니다. 참았어도 되는데 그날은 저 자신도 통제하기 어려우리만큼 악다구니를 썼습니다. 그날 밤 한없는 자괴감에 빠져버렸고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기에 저는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토요일 오후에 직장이 있는 숙소로 와버렸습니다. 정말 하찮은 저의 민낯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나니 계속 제 마음에는 회개의 마음보다는 나 자신을 정죄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다음날 그래도 예배마저 드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에 온라인으로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룟유다의 이야기를 말씀으로 전해주시는 목사님께서는 설교 처음에 제자훈련 과정에서 받으신 질문과 답변에 대한 일화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내 마음 안에서 가식적이라는 소리가 들려요. 정말 나의 믿음은 가식적인가요?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합니까? 두렵습니다.”
내가 보낸 질문이 아닌데 누가 보냈을까? 딱 그때의 제 마음을 누군가가 써서 보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옆에 있는 종이에 “가식적인 나”라는 단어를 적어두고 그날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가식적이라고 느껴지는 자체가 진리 안에 살고자 하는 갈망이지요. 하나님의 자녀 될 자격 없는데 불러주시고, 의인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데 의인으로 불러주시는 것이 딜레마입니다. 여겨주시는 대로 나의 영적인 신분대로 살아가고 누리는 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가식적이라는 마음이 어디서 오는가도 중요합니다. 사단의 음성이라면 끝없이 이 생각으로 인해 자책하게 되고 주님의 음성이라면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자기를 돌아보고 주님을 의식하고 동행하는 삶으로 나아가려 할 것입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우리를 정죄하지만 주님은 정죄 받을 만한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니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주님이 지금 나의 삶에 함께 계신 것을 믿는다면 더 주님 안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끊임없이 사단의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주님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룟유다의 마음에 사단의 생각이 들어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배신의 마음이 된 것처럼 저도 사단의 소리를 반성의 소리로 착각했습니다. 착각임을 깨닫기는 했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은 저의 모습은 여전히 가식의 가면을 벗어버리지 못한 상태입니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라는 생각이 깊이 자리잡았기에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하는 자기 합리화로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라는 말씀을 계속 들어 이제는 인이 박힐 정도이지만 저는 아직 ‘나는 죽고’ 까지만 와있고 ‘예수로 사는 삶’은 아직 인 듯 합니다. 여전히 변하기를 거부하며 제 고집대로 사는 저를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고 있다고 생각하니 “주님 저 좀 그냥 내버려두시면 언젠가 정신차리고 돌아갈 꺼예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 말고도 저를 보고 계신분이 있는 듯 합니다. 우리 목사님. 제가 심적으로 힘들 때 목사님은 저를 위해 기도하신다며 메시지를 주십니다. 난 아무 얘기도 안했는데 뭘 알고 계신걸까? 그냥 하신 말씀이라고 하기에는 주시는 말씀이 그때의 저를 위한 맞춤형이라 반박도 불가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싶기도 합니다.
엊그제도 일에 파묻혀 있던 저에게 목사님께서 ‘집사님’이라고 메시지를 주셨길래 오늘은 어떤 말씀이실까 기대감에 ‘네, 목사님’ 이라고 답을 했는데… 이번엔 간증을 부탁하셨습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지금은 제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최악이나 마찬가지인 때라 선뜻 답을 드리지 못하고 정중하게 거절하는 의사를 밝혔는데.. 우리 목사님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간증은 나를 간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며 저로 하여금 ‘네, 하겠습니다.’라는 답을 끝내 얻어내시는 분이십니다.
원래 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고 특히나 나의 본모습을 보이는 일은 너무 싫어하는 일 중 하나이기에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주님.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할까요 라고 기도하는데 주님은 저에게 간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의 실패한 모습 그리고 다른 사람이 모르는 나의 모습을 나누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제가 예수동행교회에 온 이유 중 하나도 선한목자교회에서 사람들이 슬슬 나를 알아가기 시작하니 나의 이상한 면을 파악할까 두려워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과 다시 시작하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 예수동행교회에서는 나를 온전히 드러내놓고 새로이 태어나야하는 것. ‘나는 죽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예수로 사는 삶’은 주님이 이끄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는 여전히 온전히 변화되지 못한 모습입니다. 간신히 큐티를 하고 있고 동행일기도 쓰다 말다를 반복합니다. 주님 보다는 세상의 것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보다는 잘못을 파악하는 일에 더 힘을 쏟습니다. 감성은 쏙 뺀 채 이성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사람이고 꼭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단톡방에 댓글을 다는 일도 거의 하지 않는 까칠함 그 자체입니다. 여태껏 혹시나 저에 대해 좋은 인상이셨다면 앞으로는 까면 깔수록 새로운 모습, 양파 같은 저의 모습에 ‘허걱!’ 하고 놀라실 수 있습니다. 첫 인상과 많이 다르더라도 너무 당황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호숫가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네, 주님 이제는 제 의지대로 하지 않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고자 합니다. 여전히 부족한 저의 모습까지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 주님을 더욱 의식하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도록 주님의 이끄심을 구합니다. 여전히 부족한 저의 모습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허락하신 주님, 감사합니다.